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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리히 노이만 지음 / 이유경 옮김

Ⅰ.  우로보로스

 

 

<<중심이 초래한 것은 분명히 마지막까지 있을 것이고 처음부터 있었던 것이다. >> 괴테

 

 의식 발달의 산화적 단계는 무의식에 자아가 포함되어 있는 관계로부터 시작한다.

그것은 자아가 자신의 고유한 위치를 자각하고 영웅적이로 등장하게 되는 것 뿐 아니라,

또한 자신의 고유한 활동에 의하여 일어난 변환으로 자신의 경험을 넓히고 상대화할 수 있는 상황에까지 이르게 되는 모든 것을 의미한다.

신화의 첫 번째순환은 창조신화이다. 이 시기에는 정신적인 것의 신화적 투사가 우주기원적으로 등장하여 창조신화가 된다.

시계와 무의직적인 것이 우세하게 되어, 신화의 대상들이 형성된다. 자아와 인간은 비로소 생겨나려는 상태, 이제 막 탄생하려는 상태에 있다.

자아와 인간이 겪는 것과 자립하는 것이 창조신화의 시기를 형성하는 것이다.

 

  세계부모와의 분리의 단계에서 드디어 인류의 자아의식의 핵이 드러나게 된다.

창조신화의 영역에 있는 핵은 두 번째 순환에 대한 준비를 한다.

두 번째 순환은 자아, 의식 그리고 인간 세계의 가치를 드러내게 된다. 이는 자아 자신의 고유한 의식성에 이르게 되는 영웅신화의 시기이다.

  최초에는 완전함, 전체성이 있다. 이런 최초의 근원적 완전함은 언제나 우회적으로 표현해야 된다. 

그것은 표현의 본질상 신화적으로 표현할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자아가 자신의 대상을 의식이 내용처럼 개념적으로 파악하려 할 때,

묘사하는 주체인 자아 앞에 놓여 있는 모사되어져야 할 시초의 것 모두가 헤아릴 수 없는 크기로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에서 최초에는 언제나 상징이 있게 된다.

그 상징은 다의성을 가장 많이 가진다. 즉 무규정성, 규정할 수 없음이 가장 두드러진다.

 

  최초는 두 개의 <<장소>>가 드러난다. 인류에게는 인류 역사의 근원적 시작으로서,

그리고 개인에게는 유아기의 근원적 시작으로서 나타난다. 인류 역사의 근원적 시작에 관한 자리며사는 제의와 신화의 표현에서 확인할 수 있다.

유아기의 근원적 시작도 이와 마찬가지로 무의식의 심연에서 이미 개별화되어버린 자아에게 제시하는 심상으로 드러나게 된다.

 

  이런 최초의 상태는 신화적으로 우주적인 것에 추사되고, 세계의 시작, 즉 창조신화로 나타난다. 이런 시작의 표현은 신화적으로 외적인 것, 즉 세계로서 시작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여기서 세계와 정신은 여전히 하나이기 때문이다. 여전히 반성하지 않는 , 즉 자기의식적이지 않은 자아가 자기 자신과 관계하고 이를 반성하고 있다.

정신적인 것은 세계에 개방적이고, 또한 세계와 동일시하므로 세계에서 떼어낼 수 없다.

그것은 세계로서 인식되고 세계로 드러나며 자신의 존재가 되어가는 것도 세계가 되는 것으로 경험하므로, 자신의 심상들을 성좌가 있는 천상으로 그리고 창조하는 신들로 경험하는 것이다.  

 

  카시러(E. Cassier)는 모든 민족과 종교에서 표현된 창조는 빛의 창조로 드러난다고 묘사하고 증명하였다.

그러니까 의식의 출현은 무의식의 어두움에 대조가 되는 빛으로서 등장하여, 창조신화의 특징적 <<대상>>이 된다.

계속해서 키시러는 신화적 의식의 여러 단계 에서 비로소 주관적 실제성의 발견, 즉 자아의 형성 및 개인의 형성이 있다고 제시하였다.

세계의 신화적 시작은 , 빛이 되려는 것이다. 이로 인하여 세계가 되려는 것도 비로소 그 모습을 드러낼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시초는 빛의 탄생 전이므로 여전히 어스름한 여명 상태에 있음을 의미하는데 이는 상징으로 채워져 있다.

 

  무의식의 표현 형식은 의식의 표현 형식과 다르다. 표현을 시도하지 않으며, 구체적인 논리적 설명이나 논리적 대화에서처럼 그 대상을 확정하거나 분류하지도 분명하게 밝히려고도 하지 않는다.

무의식의 방법은 그와는 다른 것이다. 설명, 이해, 그리고 해석이 필요한 것 주변으로 저절로 상징이 모이게 된다.

의식화의 행위는 다양한 면에서 나온, 알려지지 않는 것을 대략적으로 그리고 묘사하고 있는 상징을 그 대상 주변으로 집중이 되도록 모으는 것에서 이루어진다.

각 상징은 이해되어야 할 것의 또 다른 본질적 부분을 폭로하고, 그래서 또 다른 의미의 측면을 밝히는 것이다.

 

의문시된 중심의 주변에 모인 상징, 소속되는 상징들 군집의 규범이 드러나야 비로소 그 상징이 의미하려는 것에 대한 통찰이 가능해진다.

모든 시기의 신화가 우리에게 말해주는 시초에 관한 상징적 사실은,

오늘날 발달된 형태적 의식이 하지 않는 방식으로 문제와 수수께끼를 극복하려는 소위 초기 유아기적 인간 의식의 시돌 나타난다.

이는 인식적 비판을 포기하여 우리의 의식이 대립적 입장을 취하지 않는 태도로서,

학문적이로도 나타낼 수 도 없는 시초에 대한 의문을 가지고 고심할 때야 비로소 그 답을 가질 자격이 생기는 것과 같다.

그러나 심혼은 의식의 자기비판을 통하여 어쩔 수 없이 이러한 질문을 하게 된다.

그것은 언제나 새로운 의식에 관한 본질적 질문으로 주어지게 된다.

 

  시초에 대한 질문은 <어디로부터>라는 질문이다. 이는 근원에 대한, 그리고 운명에 대한 질문으로, 어디에 근거하여 우주론, 즉 창조에 관한 신화가 생겨나는가를 묻는 것이다.

이는 언제나 새롭고도 다른 대답을 하도록 한다. 그러나 세계가 어디에서 비롯되는가라는 기원에 관한 질문은 언제나 인간이 어디레서 비롯되는가와 같은 것이고,

또한 의식과 자아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인가와 같은 질문이다.

이것은 결국 <내가 어디에서 비롯되는가>라는 운명적 질문으로, 자기의 의식화가 되려는 문지방에 이르게 될 때 모든 인간의 본질에서 비롯되는 질문이다.

  이 질문에 대한 시화적 대답은 심혼의 깊이, 즉 무의식에서 올라온 모든 대답이 그러하듯 상징적이다. 상징의 비유성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그것을 이건 이렇고, 저건 저렇다고 말하는 의식의 논리적 -수학적 대답으로 잘못 이해한다.

동일성을 나타내는 문장(A=A)과 그에 기초한 의식의 논리는 심혼과 무의식에 전혀 유호하지 않다.

심혼은 마치 꿈처럼 이것과 저것을 마구 섞어서 짜 맞추고 엮어놓는다. 그래서 상징은 유비지만, 어쩌면 하나의 방정식에 비유된다.

이것이 의미를 풍부하게 하지만 확정될 수는 없게 한다. 부분적으로 모순에 찬 유비들의 관계로 엮어서 상징 집합을 이루어 알려지지 않는 어떤 것을 형성하게 되는데,

그것이 의식에게는 더 이해하기 어렵고 의식하기 힘든 것이 되고 만다.

  시초의 완전함을 나타내는 상징적 측면은 원으로 표현된다. 이것에 구, 알, 둥근 것, 즉 연금술의 우너이 함께 한다. 그것은 최초에 있었던 플라톤의 원이기도 한다.

 

  그 때문에 데미우르구는 세계를 구와 같이 만들고, 그것의 형상을 가장 완전하면서도 자기 자신과 같게 하였다.